간접성에 관하여 : 이강욱의 중성화 하는 “단계”들 - Lee Kang Wook

Criticisms

간접성에 관하여 : 이강욱의 중성화 하는 “단계”들

2005

심상용 | 미술사학 박사, 동덕여대 교수


〈Invisible Space - 03051〉, 2003, 캔버스에 혼합매체, 80 x 130 cm ©Artist

이강욱의 회화는 장식적이다. 빛을 받으면 보석처럼 빛나기도 한다. 이미지는 부드럽고, 색조는 약간 창백한 파스텔 톤으로 차가운 편이다. 예민하게 실천된 감각적인 곡선들은 한 곳에 응집되었다. 어느새 캔버스 전체로 퍼져나가곤 한다. 이미지의 전반적인 인상은 단정하고 질서정연하며 도시적이고 여성적이다. 한 미술평론가는 그의 세계에서 ‘우연’, ‘유희적 속성’, 그리고 ‘무질서 속의 조형적 질서’를 중요하게 언급한다.

하지만, 이강욱의 회화는 우연이 아니라 우연의 통제에 의해 더 잘 설명될 수 있다. 자신의 고유한 회화적 단계를 차례로 거치는 과정에서 유희는 계산과 질서유지의 방식들로 인해 완화되고, 우연은 통제된다. 등장하는 모든 요인들은 거의 완전하게 자신의 자리를 찾고 질서정연하게 실천되고 있다. 이강욱 이미지의 이같은 속성은 어떤 의미에서 간접성의 귀결이다.
 
간접성이 이강욱의 세계를 여는 단초일 수 있다 할 때, 그 간접성은 결코 단번의 직접적인 요인으로 인해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는 의미에서의 간접성이다. 즉 각각의 단계를 거치면서 확보되는 간극들의 축적, 또는 점진성에서 기인하는 간접성이다. 실제 이강욱의 세계는 완성되기까지 여러 단계를 거친다. 개략 그것은 서너 개의 단계로 구성되는데, 주어진 캔버스의 바탕에 (불분명하지만) 동,식물의 세포를 확대한 듯 한 현미경 사진 이미지를 얹히는 것이 그 첫 번째 과정이다. 이 이미지들로 인해 화면에는 어떤 꿈틀거림 같은, 명백하게 규명하기 어려운 생명의 단서들이 자리하게 된다.
 
그 다음은 그 위에 흰색의 반투명 물감을 두텁게 칠함으로써 그 이미지가 겨우 정체를 알아볼 수 있을 만큼만 희미하게 배어 나오도록 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화폭 전체는 이미지의 직접성과 노골적인 드러냄을 후퇴시키는, 불확실한 배음(背音)을 가진 차가운 파스텔 톤으로 화한다. 현미경적으로 확대된 세포 이미지는 세부묘사가 사라지고 톤이 완화된 채로 은밀하게 잠재하게 된다. 이 잠재성이 화면 전체에 모호하지만 분명 존재하는 어떤 유기적인 뉘앙스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 다음의 과정은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중층의 구조 위로 일관된 속성의 곡선들을 세련되게 왕래시키는 것이다. 연필과 펜 등을 사용해 분방하면서도 중심과 변두리가 분명한, 맺혔다 풀려나가곤 하는 정돈된 유연함의 드로잉을 실현하는 것이다. 이 선들에 의해 집중과 분산, 몰입과 산만의 긴장감이 화면 전체에 조성되게 된다. 또한 이 선들은 최종의 과정, 즉 다양한 표지들을 남기고 미세규모의 큐빅, 유리구슬 등을 캔버스 위에 뿌려나가는 데 있어 기준선이 되기도 한다.
 
이제 마지막은 이 선들의 궤적을 따라 무수한, 그리고 다양한 속성의 표지들과 동시에 반짝거리는 무수한 것들을 뿌리는 과정이다. 그것들은 때로 선의 중간 중간에, 혹은 주변에 임의로 찍혀진 듯 한 무수한 선들이거나 얼룩이고, 점보다는 큰 다양한 크기의 원형이거나, 끝내 모호한 어떤 암호 같은 것들이기도 하다. 선이 지나가는 거의 모든 곳에 예외없이 등장하는 이 무수한 지표들에 의해 이강욱의 이미지는 어떤 지도의 일부와 흡사해 보이기도 할 것이다. 또한 이 크고 작은 유리구슬들이 빛을 반사하는 동안 이미지의 장식성은 극대화된다. 이미지를 더욱 지도, 혹은 우주의 궤도표시처럼 보이게도 하는 이 반짝거림으로 인해 이강욱의 회화는 더욱 장식적이고 화려한 문명의 상징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이러한 복합성, 곧 직접성의 결여인 그것으로 인해 이강욱의 세계는 매우 탈성격화된 중성의 것이 된다. 그것은 추상도, 구상도 아니다. 내러티브이기도 하고, 동시에 그것의 부정형이기도 하다. 부드러우면서도 차갑고, 잠재적인 생동을 표방하는 듯 하면서도 지표들의 건조한 군집에 지나지 않기도 하다. 이러한 모호함, 그 어떤 직접적인 서사도 회피하는 것이 이강욱 회화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다.
 
이강욱 회화를 완성해 가는 각각의 단계들은 서로를, 그러나 조용히 상쇄한다. 우리의 생이 생성되고 조직되는 근원적인 모티브에서 출발하지만, 그것과는 전혀 무관한 곳에 종착한다. 세포조직 같은 뭐라 설명을 대기 어려운 원시성은 오히려 문명적이고 도시적인 속성에 가 닿는다. 메시지의 무게는 한결 완화된 반면, 분위기는 모호한 추상에 가까워진다. 일테면 중화의 과정을 겪어나가는 것이다. 이러한 상쇄는 큐빅과 유리구슬의 산포에 이르러 결정적인 것이 된다. 반짝거림이 그나마 화면 안에 잔류했던 야성을 남김없이 제거해버리기 때문이다.
 
이것은 화면이 어떤 도발적인 차원의 요인도 제거해 가는, 기꺼이 도시적이고 교양적인 쪽으로 굴절되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강욱의 회화가 거치는 이같은 단계들을 점진적인 축적의 과정으로 볼지 상쇄의 과정으로 볼 지는 관점의 문제일 수 있다. 단 그것이 축적이든 상쇄든 분명한 것은 이 점진적인 중간과정들의 작동에 의해 최초의 투여와는 사뭇 다른 결과가 산출된다는 데에 있다. 바로 이 것이 작가의 세계에서 간접성을 언급하는 이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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