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잠재력의 회화적 모나드를 향한 열정 – 이강욱 작가의《1mm의 경계》 Place C 전시에 부쳐 - Lee Kang Wook

Criticisms

열린 잠재력의 회화적 모나드를 향한 열정 – 이강욱 작가의《1mm의 경계》 Place C 전시에 부쳐

2025.03.03

하선규 | 한국미학예술학회 회장, 미학


〈Untitled-15019〉, 2015, 캔버스에 혼합매체, 160 x 260 cm ©Artist

이강욱은 한국 현대 추상회화를 대표하는 중견 작가다. 25년 동안 그는 끊임없이 추상회화 연작을 세상에 내놓았다. 연작은 ‘비가시적 공간(Invisible Space-image)’, ‘지오메트릭 폼(Geometric form)’, ‘제스처(The Gesture)’ 등 낯선 제목을 달고 있다. 게다가 제목 없이 ‘라인’ 연작, ‘무제’ 연작이라 불리는 작품도 그 수가 적지 않다. 다행히 감상자가 이강욱의 작업에 다가가기는 어렵지 않다. 연작에 속한 작품들의 구도, 형상, 패턴이 유사하게 반복되고, 마치 금속을 세공하듯이 한땀 한땀 새겨넣은 미세한 선과 색조가 전체적으로 부드럽고 따뜻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품의 초대에 응한 감상자는 이내 난감해진다. 작품의 입구와 출구가 어디인지, 어디서 시작해서 어떻게 움직이고 어디서 끝내야 할지, 감을 잡기가 어렵다. 작가가 대단히 냉철하게 사유하고, 치밀하게 세부와 전체를 구축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의 손길을 이끌어간 이념과 밑그림, 화면 구축의 경로와 지향점을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밝고 우아한 골목길에 들어섰다가 끝없는 미로에 갇혔다고나 할까.
 
한 걸음 물러서서 생각해 보자. 화가 이강욱에게 캔버스는 어떤 공간일까? 작가는 실제 현실의 공간과 사물, 색과 빛, 현상과 운동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자신이 직접 느끼는 기분과 감정, 환상이나 욕망도 그의 관심사가 아니다. 반대로 그의 시선은 보이지 않는 차원을 향해 있다. 모든 직접성을 넘어선 차원, 직접성의 심층에 있는 보이지 않는 구조를 향해 있다. 그런데 작가에게 그러한 차원과 구조는 어떤 단일한 것, 어느 한 장소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선명하게 대립하는 양극단으로 분열되어 있다. 바로 이로부터 작가의 이중적인 시선 또는 중층적인 작업 방식이 등장한다.
 
이강욱 작가가 20대 중반부터 물질과 생명의 가장 미세한 차원에 깊이 파고든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작가 활동을 시작하면서 보이지 않는 분자와 미립자 구조, 혈소판과 세포 형태를 화폭에 끌어들였다. 물론 이들을 단순히 모사한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고유한 표현 방식으로 가공하여 회화적인 ‘기초 요소’ 또는 ‘주도 악구’로 변신시켰다. 그러나 이강욱은 극도로 미세한 차원과 구조를 조심스럽게 주제화할 때, 늘 무한하고 총체적인 차원을 함께 바라보고 있다. 그의 시선은 가장 미미한 것과 가장 숭고한 것을 동시에 주시하고 긍정하는 시선이다. 그의 눈과 손은 이를테면, 어떤 명료한 믿음 위에서 움직이고 있다. 그것은 가장 미미한 것 속에서만, 가장 미미한 것을 통해서만, 가장 크고 숭고한 것이 구체화되고 실현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이 믿음은 정신사적으로 볼 때, 르네상스 사상가 쿠자누스(Cusanus)의 심오한 명제 “대립된 것들의 합치(coincidentia oppositorum)”에 맞닿아 있다. 이는 대립된 것들이 서로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공존하고 상통하고 합치를 이룰 수 있음을 나타낸다. 경이로운 근대철학자 라이프니츠(G. W. Leibniz)는 이 명제를 우주 전체의 원리에 적용하였다. 이로부터 탄생한 개념이 바로 “모나드(Monad)”다. 라이프니츠는 우주 전체가, 마치 미생물처럼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살아있는 근본 실체들로 꽉 차 있다고 여겼다.

그는 이 보이지 않는 형이상학적 실체를 모나드라 불렀다. 이강욱의 작업은 여러 측면에서 모나드 개념과 깊은 친화성을 보여준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강욱에게 캔버스는 ‘회화적 모나드’의 실험실이다. 작가의 지난 여정은 우주 전체의 회화적 모나드를 창안하고 현시하기 위한 노력의 연속이었다. 이강욱은 회화적 요소, 재료, 기법을 활용하여 물질과 생명의 ‘근원적 개체’, 그리고 그러한 개체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파장과 운동을 감각적으로 조형하고 표현해 온 것이다.
 
회화적 모나드의 창안이란 관점에서 작품에 다가서면, 몇 가지 흥미로운 의문을 풀어낼 수 있다. 우선, ‘라인’, ‘무제’, ‘비가시적 공간’, ‘지오메트릭 폼’, ‘제스처’ 등으로 확장된 연작의 연관성을 좀 더 명확히 파악할 수 있다. 이들 연작의 변화와 연속은 결코 자의적 결정이나 우연한 중첩이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회화적 모나드를 향한 작가의 치열한 구상과 실험이 진화해 온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모든 진화가 그렇듯이, 이강욱의 작업도 수직적인 진전과 도약뿐만 아니라, 수평적인 공존, 연결, 확산의 계기도 포괄하고 있다. 인상적인 것은 진화의 방향이다.

그가 창안한 회화적 모나드는, 마치 배경음악처럼 뒤로 물러나 있던 거시적 차원과 작가의 신체를 점점 더 명료하게 의식하고 시각화하는 방향으로 진화해 왔다. 여기서 시각화란 말을 눈을 통한 지각에 국한된 것으로 이해해선 안 된다. 모나드가 모든 우주 만물과 생명 현상의 근원인 것처럼, 작가가 현시하려는 회화적 모나드도 가시적인 형태와 구조는 물론, 모나드들 사이의 감각적인 관계성과 소통 가능성을 함께 아우르고 있다. 그의 회화적 모나드 자체가 무한한 우주를 위한 살아있는 근원 개체이기에, 그것은 지금까지 계속 진화해 왔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회화적 모나드를 염두에 둘 때 두 번째로 분명해지는 것은 이강욱의 작업이 애초부터 회화의 존재 자체를 향해 있다는 점이다. 그의 작업은 철저하게, 근본적으로 회화의 새로운 정립을 시도한다. 이것은 불가피한 귀결이다. 왜냐하면 회화적 모나드가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물음과 실험은, 오늘날 캔버스 공간이, 아니 회화가 과연 무엇이며, 얼마나, 어떻게 인간의 미적인 지각과 실천을 자신 안에 품을 수 있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로 나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 총체적이며 거대한 성찰을 어떻게 그토록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었을까? 그러한 성찰을 어떻게 그렇게 거듭 새로운 형상으로 옮길 수 있었을까? 아마 두 가지 긍정적인 확신 덕분일 것이다. 하나는 회화가 여전히 자신을 근본적으로 재창조할 수 있다는 확신이고, 다른 하나는 미시적 구조와 거시적 우주, 정지와 운동, 순간과 지속, 신체와 흔적 등 서로 대립하는 것들이 캔버스 속에서 합치되어 회화적으로 재현될 수 있다는 확신이다. 동시대 작가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이 두 가지 확신이 이강욱 작가에게 지속해서 지적 에너지와 실천적 열정을 제공해 주었다.
 
세 번째로 회화적 모나드 개념을 통해 작업의 감각적 특성을 좀 더 세밀하게 조명할 수 있다. 라이프니츠의 모나드와 달리, 이강욱이 현시하려는 모나드는 감각적 구체성과 형상성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작가의 모나드는 하나의 특정한 형상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연작의 기본적인 구상과 회화적 요소와 재료를 다루는 기법에 따라, 그것은 스스로 증식하는 점과 선으로, 혹은 반복과 차이를 산출하는 기초 도형들로, 혹은 파동과 변형을 수반한 색조의 문양으로 나타난다. 같은 연작에 속한 개개의 작품에서도 모나드의 본원적인 복수성과 다원성을 확인할 수 있다. 모나드는 절대적으로 유일무이한 하나다.

하지만 만물의 극소 차원과 무한 차원을 서로 이어주고 교류하도록 해준다는 점에서, 모든 모나드는 동등하고 평등하다. 여기서 라이프니츠와 구별되는 또 다른 중요한 차이점이 분명해진다. 이강욱의 회화적 모나드에는 처음부터 다른 모나드들과 공감하고 소통할 수 있는 ‘창문’이 있다. 라이프니츠는 파괴할 수 없는 단일성과 개체성에 집착하여 형이상학적 ‘실체’ 개념을 떠나지 못했다. 반면, 이강욱은 감각의 생산적인 복합성, 모호성, 확산성을 바탕으로 상호 공명하고 소통하는 모나드를 상상하고 구현한다.

그가 무진장한 캔버스 위에 점을 찍고 선을 그릴 때, 그 점과 선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지만, 잠재적으로 이미, 늘 다른 점과 선을 떠올리고 있다. 어떤 예정된 성좌(constellation)를 실제로 함께 형성한다는 것이 아니라, 점과 선의 존재 성격이 감각적인 상호 공명, 상호 작용, 상호 침투의 ‘잠재성 자체’라는 것이다. 그것은 실체 없이 감각적으로 서로 공명하고 소통할 수 있는 모나드, 기능적으로 무한히 열려 있는 ‘잠재력의 모나드’이다.
 
이 때문에 이강욱의 작업과 만날 때, 외적으로 드러난 형태나 구도에 집중하면 안 된다. 그보다는 미세한 요소들이 어떻게 서로 이어지고 공명하고 퍼져가는지, 그러한 이어짐, 공명, 퍼짐이 어떤 두드러진 벡터의 파동을 형성하는지, 그때 어떤 미묘한 빛, 명암, 색조의 변화를 야기하는지 등을 최대한 섬세하게 감지해야 한다. 나아가 미시적 차원과 거시적 우주가 어떻게 공존, 대립하고, 또 어떻게 서로 연결되고 교류하는지, 그러한 대립과 교류가 어떤 다채로운 리듬, 강도, 방향, 운동의 암시력을 환기하는지 예민하게 느껴야 한다.
 

회화적 모나드의 감각적 특성에 주목하면, 저절로 주체성(subjectivity)의 문제를 떠올리게 된다. 다른 예술처럼 회화도 인간이 만든 문화적 형성물이지만, 동시에 인간을 형성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중요한 미술 작품은 주체성의 형성과 변화, 곧 인간의 감각, 지각, 상상력, 사유 방식이 만들어지고 변화하는 데 의미심장한 역할을 해왔다. 이강욱의 작업은 주체의 몸과 마음을 어떤 가상과 유희의 움직임 속으로 초대할까? 공감적으로 소통하는 주체는 열린 잠재력의 모나드들이 다원적으로 생성되고, 서로 연결되고 공명하는 과정에 참여한다.

주체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미시적 구조와 거시적 우주의 구별을 뛰어넘는 감각적 가상과 상상력의 유희에 참여한다. 주체는 모나드들 사이를 여행하는 노마드가 된다. 캔버스에서 생성되고 전개되는 리듬, 강도, 방향, 운동의 확산과 공명에 자신을 감각적으로 동일시하는 유희의 노마드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모나드들의 연결과 공명이 극도로 미세하고 미묘한 점과 선의 장 속에서, 실체와 중심이 없는 흐름 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주체 또한 감각, 감정, 상상의 모호성과 이중성을 전적으로 긍정하는 미적 유희의 주체가 된다.

하지만 미적 유희의 주체는 캔버스에서 불현듯 두드러지는 어떤 형상과 의미에 안주할 수 없다. 무진장한 캔버스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작가의 진지함, 무엇보다 모든 단순한 논리와 비약을 경계하는 작가의 태도와 치밀한 작업 방식이 손쉬운 결론을 거절하기 때문이다. 이강욱의 작업은 주체에게 이렇게 말을 건네는 듯하다. ‘그대는 캔버스의 무한함을 신뢰하면서 회화적 모나드의 생성과 진화를 조심스럽게 따라가고 공감해야 한다. 하지만 그대는 어떤 경우에도 그대 자신의 감각, 상상, 사유의 생동하는 자유로움과 창조성, 이를 바탕으로 펼쳐져야 할 평등한 공감과 소통의 가능성을 망각하거나 포기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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