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toried Space of New Abstract Painting - Lee Kang Wook

Criticisms

The Storied Space of New Abstract Painting

2016

정연심


Installation view of《Paradoxical Space: The New World》©ARARIO GALLERY

I.
한국과 영국에서 회화를 공부한 이강욱은 국내외에서 10여회에 걸쳐 개인전을 선보여왔다. 그는 2008년에 영국으로 여행을 갔다가 그 이후 줄곧 런던 베이스로 국제적으로 작업하게 되었다. 최근 일본의 도쿄 갤러리나 싱가포르의 개인전에서는《Invisible Space》라는 제목을 가장 많이 사용하였고, 2014년에는《Minimum vs. Maximum》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에게 이러한 제목은 우연히 선택된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오는 ‘지시어’ 혹은 ‘손짓’ 역할을 한다. 오랫동안 런던 베이스로 활동하던 그가 국내에서 오랜만에 보여주는 전시 제목은《Paradoxical Space: The New World》이다. 우리말로는 ”역설적 공간: 새로운 세계”라고 부를 수 있겠다.
 
이강욱의 회화 작업은 초창기에는 한 이미지를 거시적으로 보았을 때와 미시적으로 관찰했을 때의 차이와 균열에 집중했다. 점차 그는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세포와 신경계를 즐겨 다뤘으며 캔버스 위의 형태들은 유기적인 조직망을 갖추게 되었다. 이러한 양상은 아라리오 갤러리의 ‘역설적 공간’에도 계속된다. 전시에 포함된 다양한 크기의 기하학의 형식은 유기체적인 표면을 매끄럽게 형성한다.

그는 런던으로 베이스를 옮기면서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세포조직체에 대한 관심을 넘어, 점차 인도의 고대 철학인 우파니샤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 철학은 브라만이라고 하는 우주적인 영속 세계와 아트만이라고 하는 일시적, 가변적 세계의 조화를 중심으로 한다. 두 세계는 서로 다른 영역이 아니라, 전체와 부분을 구성하는 ‘하나’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는 우파니샤드 철학에 몰입하면서 우주를 구성하는 최대 개념과 최소 개념이라는 ‘대립적 개념’이 우리의 일상 속에, 혹은 캔버스의 화면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하다.
 
이강욱의 새로운 공간, 즉 신추상은 포스트미디엄의 시대에 회화의 존재론에 질문을 던지는 것처럼 보인다. 회화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기학학적인 형식은 일시적으로 부유하는 듯한 수많은 톤들과 함께 ‘하나(oneness)’를 구성한다. 전체와 부분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면서 그가 탐닉한 우파니샤드는 캔버스 화면 위의 회화세계에서 선과 톤을 통해 하나로 이야기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제작된 그의 회화는 개념적 사유를 담아내는 그릇이 되었으며, 생각하는 과정은 그림을 ‘그리는’ 프로세스 속에 모두 기록처럼 체화되었다. ‘패러독스’란 단어 자체가 서로 상반된 개념이나 특징을 포함하는 것인데, 이강욱의 ‘역설적 공간’이란 사물의 이항대립적 현상과 시각 언어들이 이분법적 구조를 취하지 않는 유동적, 흐름의 공간이며 틈이 무너지고 경계가 사라지는 ‘새로운 공간’이다. 수많은 선의 흐름으로 끊임없는 망을 형성하는 레이어드(layered) 구조는 이강욱이 이야기하는 ‘참조’의 흔적으로, 혹은 제스처로 존재한다.
 
그런데, 이강욱의 회화는 가장 기본적인 추상형식을 수렴하고 있지만 그의 추상은 모더니즘 화가들이 천착했던 ‘환원적(reductive)’인 시각언어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의 추상 언어는 수많은 레이어드가 중첩되는 복잡한 층을 구성함으로써, 평면효과를 탈피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강욱의 작업에는 ‘장식적인’ 흔적이 남아있다. 무슨 뜻일까. ‘장식적(decorative)’이라는 말은 흔히 모노크롬 추상회화에서 볼 수 있었던 무거운 분위기의 진지함을 드러내는 방식과는 상당히 대조적이다. 그것은 가볍거나 ‘블링블링(bling bling)’한 효과를 동반한다. 또한 ‘장식적’이라는 표현은 작가가 실제로 사용하는 장식 효과의 재료적 의미를 넘어선다.

그것은 거리에서 들리는 수많은 수다나 스마트폰의 채팅에서 느낄 수 있는, 혹은 대중문화 코드에서 발견할 수 있는 ‘반짝거리는’ 블링블링한 오늘날의 문화코드를 상징한다. 부유하는 선들은 섬세하면서도 강렬하며, 투박하거나 무거움과는 거리가 멀다. 또한 반짝거리는 회화 표면은 시지각의 효과뿐 아니라, 조명의 위치에 따라 상당히 다른 관람자의 반응을 유도한다. 이러한 효과를 지닌 회화들은 점, 선, 면을 구성하는 작업과 달리, 별들이 쏟아지는 모습이나 천체를 상상하게 한다. 이것은 회화공간을 아주 따뜻하고 섬세하게, 혹은 모호한 공간으로 만든다. 이를 통해 그의 회화는 다양한 크기를 통해, 물리적 공간 밖으로 확장해나가며, 여기에는 ‘상상력’이 작동한다. 반짝거리는 공간은 우리의 이성을 미끄러지게 하는 가상의, 상상 공간이다.


Installation view of《Paradoxical Space: The New World》©ARARIO GALLERY

II.
실제로 이강욱은 캔버스 위에 반짝이는 혼합 매체를 사용하기도 했으며, 다양한 톤을 구성하기 위해 색채의 변주를 시도하였다. 원형으로 구성된 다양한 톤은 마치 무한 공간으로 이어지는 ‘환영적’ 공간을 구성해낸다. 층층이 톤을 이루는 공간에는 색채보다는 선적 드로잉과 톤으로 작가의 움직임과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다. 이것은 작품의 아우라와 분위기를 극대화시킨다. 이강욱의 작품은 겉으로는 완전한 추상, 혹은 극도의 노동을 요하는 세밀화처럼 보이지만, ‘추상처럼’ 보이는 신추상의 세계이다. 여기에는 항상 이야기가 뒤따른다. 이것은 국내외의 추상화가들이 대부분 ‘주제의 배제’라는 명목으로 스토리를 제거하였던 역사적 맥락과는 상반된 부분이다.
 
과거 추상화가들은 자신들의 작품을 이야기 공간으로 설명하는데 인색한 편이다. 선의 울림으로 감동을 느끼라거나, 혹은 숭고한 색채로 심리적으로 느껴보라는 방식을 취한다. 내러티브가 있는 구상회화가 아닌 이상, 관람자들도 추상회화에서 이야기를 발견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이러한 문맥과 달리, 이강욱의 추상화에는 독특한 지점이 발견된다. 예를 들면, 이강욱의 작업실을 방문한 12월 초, 나는 이 작가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듣고 있었다. 그리하여 젊은 작가가 그린 신추상은 우연한 감정의 울림을 표현한 것도 아니고, 내적 필연성에 따라 그려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글을 써 내려가듯이 독백조의 이야기가 리듬을 따라 자리잡은 ‘회화적 공간’이라는 느낌을 더욱 많이 주었다.
 
이강욱의 추상회화는 한국의 동시대 미술에서 새로운 추상의 형성으로 볼 수 있겠으며, 글로벌한 맥락에서 보자면 에티오피아 출신의 작가 줄리 메레투(Julie Mehretu)와 사라 모리스(Sarah Morris)의 추상화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모리스와 메레투가 도시 공간과 구조 등을 매핑하는 회화적 형식을 취한다면, 이강욱은 최대와 최소, 거시적 세계와 미시적 세계, 가시성과 비가시성이 공존하고 중첩되는 회화적 공간을 구축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이강욱은 모순적이고 상충하는 개념이나 시각 요소들을 '역설적 공간' 안에서 구현한다. 또한 이강욱의 추상화에는 단색화 작가들이 강조했던 신체의 행위성은 분명이 드러나지만, 단색화 화가들이 강조했던 물질성을 벗어나 그는 레이어드와 톤으로 이야기를 구성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이강욱은 아주 다른 ‘형식’으로 21세기 초의 추상화를 제작하면서 ‘이야기’를 구축하거나 매개하는 공간으로 추상화를 접근한다.
 
그리하여, 이강욱의 추상회화는 많은 부분에 있어서 기존의 추상과는 상이한, 역설적 지점을 마련한다. 많은 이야기가 서로 얽히고 엮어있는 ‘네트워크(network)’ 구조이다. 이는 전후에 전개된 한국과 서구의 추상예술이 동양적 정서와 미학, 전통에 기대며, 기원과 근원으로 복귀하려고 했던 경향과는 차이가 있다.i 니콜라 부리요(Nicolas Bourriaud)가 줄기에서 뻗어나가는 뿌리를 의미하는 ‘래디컨트(radicant)’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듯이, 이강욱의 회화 공간에서 엿보이는 망과 톤은 서로 얽히며 중첩된 네트워크 구조를 형성한다.

이것은 이질적인 요소와 문맥들이 혼재하는 공간이다. 엄밀하게 본다면 2차원적 회화 공간 속에서 만들어지는 평면성과 무한성으로 중첩된 네트워크 구조가 이강욱 특유의 특이성(singularity)을 만들어낸다고 본다. 즉, 이강욱의 '신추상 회화'는 과거의 추상미술과 모더니즘과의 차이성과 유사성을 반복하는 이질적 지점을 만들어낸다. 이것은 이강욱이 동시대 회화에 대해 던지는 발언이며, 동시대 추상미술의 존재론일 것이다.
 
이강욱의 추상회화는 2015년 봄, 그가 쓴 글의 제목대로 "절제의 미학(Aesthetics of Moderation)" ii 에서 우러나온 ‘역설적 공간’의 세계로, 너무 무겁지도 너무 가볍지도 않은 공간이자, 과하게 감추지도 드러내지도 않은 회화 공간이다. 그는 다층적인 스토리를 ‘매개’하고, 사유하는 공간을 통해 회화의 개념을 새롭게 접근, 확장해나간다. 그의 신추상 미술은 여전히 진행 중인 작업으로 그 추이는 앞으로 계속 지켜봐야 할 부분이지만, 다양한 매체가 혼재하는 포스트 포스트모더니즘 시기에 이강욱의 회화는 새로운 비평적 도전과 회화적 열기를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이강욱의 작품을 보면서 회화는 결국 가장 오래된 미디엄(medium)이지만 여전히 새로운 소통과 매개의 미디아(media)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i) Yeon Shim Chung, "The Storied Space of Korean Dansaekhwa: The 1992 and 2012 Exhibitions," published in "Symposium: Postwar Abstraction in Japan, South Korea, and Taiwan", M+ Hong Kong, June 28, 2014.
ii) Lee Kang Wook, "Abstract Painting and the Aesthetics of Moderation," Ph.D. Dissertation, University of East London,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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